2021년 말, 차를 바꿔야 하는 시점이 왔습니다. 당시 전기차 시장은 지금과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아이오닉 5가 막 나온 시점이었고, 테슬라 모델 Y 국내 인도는 아직 본격화되기 전이었죠. 고속도로 충전소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사진이 커뮤니티에 올라오던 때입니다. 순수 전기차로 가기엔 이르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매일 편도 30km를 기름 태워가며 출퇴근하는 것도 아까웠습니다. 출퇴근만이라도 전기로 해결하고 싶었죠. 그래서 눈에 들어온 것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그중에서도 BMW X5 45e였습니다.
▲ 출고 당일. 풍선 세레모니는 처음이라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전기차도 내연기관도 아닌 절충안,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는 말 그대로 절충안입니다. 짧은 거리는 전기로, 먼 거리는 엔진으로. 제 왕복 출퇴근이 60km인데, X5 45e의 전기 주행거리가 카탈로그 기준 50~60km였습니다. 딱 맞는 셈이죠.
거기에 이 차는 BMW의 직렬 6기통 3.0L 가솔린 엔진이 들어가 있거든요. 이게 결정적이었습니다.
6기통 3리터 PHEV는 생각보다 드뭅니다
PHEV SUV 시장을 보면, 대부분의 차가 2.0L 4기통 엔진을 씁니다. 볼보 XC60·XC90 리차지가 2.0L 4기통 터보, 아우디 Q5 PHEV도 2.0L, 현대·기아의 투싼·쏘렌토 PHEV도 1.6L 4기통이죠. 3.0L 6기통 이상을 쓰는 PHEV SUV는 손에 꼽습니다.
| 모델 | 엔진 | 합산 출력 | 전기 주행거리 |
|---|---|---|---|
| BMW X5 45e | 3.0L 직렬 6기통 | 394마력 | 약 50~60km |
| 포르쉐 카이엔 E-Hybrid | 3.0L V6 | 463마력 | 약 40~50km |
| 레인지로버 PHEV | 3.0L 직렬 6기통 | 440마력 | 약 80~85km |
| 볼보 XC90 리차지 | 2.0L 4기통 | 455마력 | 약 50~60km |
| 현대 투싼 PHEV | 1.6L 4기통 | 265마력 | 약 50km |
카이엔이나 레인지로버는 가격대 자체가 다른 차입니다. 1억 전후에서 6기통 PHEV SUV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X5 45e뿐이었죠.
차이는 고속도로에서 바로 느껴집니다. 4기통 PHEV는 배터리가 바닥나면 2.5톤짜리 차체를 작은 엔진 하나가 끌어야 하거든요. 답답하죠. X5 45e는 배터리 없이도 3리터 6기통이 받쳐주니 고속 추월에서 여유가 있습니다. 엔진 걸렸을 때 나오는 부드러운 회전감은 한번 타보면 4기통으로 돌아가기 어렵더군요.
▲ 출고 직후 실내. 12.3인치 디스플레이와 크리스탈 기어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전기 출퇴근이라는 이상, 충전이라는 현실
편도 30km, 왕복 60km. 스펙상으로는 전기만으로 출퇴근이 됩니다. 실제로도 됩니다. 충전만 잘하면.
문제는 이 “충전만 잘하면”이죠.
저는 회사에 완속 충전기가 있어서 근무 중에 충전했습니다. 아파트는 신축이었는데도 초기에는 충전기가 모자랐죠. 퇴근하고 들어가면 자리가 없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2년 전쯤 아파트에 충전기가 대폭 늘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초기에 회사 충전기가 없었다면 꽤 고생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부지런하지 못합니다. 퇴근하고 지쳐서 들어오면 충전 케이블 꽂는 것도 귀찮습니다. 전기 다 쓰면 그냥 기름으로 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죠. 한 달에 한두 번은 6만 원 넘게 주유합니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 느낀 것들
차를 살 때는 둘만 탔습니다. 지금은 셋이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잘 샀습니다.
SUV는 아이를 카시트에 태울 때 확실히 편합니다. 세단은 허리를 90도로 숙여서 아이를 밀어 넣어야 하는데, X5 높이면 서서 자연스럽게 앉힐 수 있습니다. 유모차 접어서 트렁크에 넣는 것도 수월하죠.
▲ 아이가 없던 시절의 캠핑. 트렁크가 넓어서 차박도 가능합니다.
다만 이 차, 밖에서 보면 큰데 뒷자리는 생각보다 안 넓습니다. 바닥에 배터리가 깔려 있어서 일반 X5보다 트렁크 지하 공간이 줄었고, 레그룸도 체급치고는 빡빡합니다. 카시트 달면 앞좌석을 앞으로 당겨야 하죠.
아이가 카시트에 앉아서 앞좌석 등받이를 신나게 찹니다. 차의 문제는 아니지만, 뒷자리가 5cm만 더 넓었으면 발이 안 닿았을 겁니다. 지금은 시트 커버를 붙여서 버티고 있습니다.
4년을 돌아보며 —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라는 선택
▲ 가을 출근길. 4년이 지났지만 디자인은 여전히 마음에 듭니다.
이 차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부지런하면 전기차, 게으르면 고급 내연기관.” 충전을 챙기면 출퇴근은 전기로 해결되고, 장거리에서는 6기통이 부드럽게 받쳐줍니다.
PHEV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과도기 선택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과도기에도 최적의 답은 있습니다. 2022년 시점에서 전기차 인프라가 불안하고, 장거리 걱정 없이 출퇴근 기름값은 아끼고 싶었던 저한테는 이 차가 딱 맞았죠.
지금 다시 산다면 전기차를 볼 것 같습니다. 하지만 4년 전 그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구매를 고민 중인 분이라면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ev.or.kr)에서 충전소 인프라부터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충전 환경이 곧 이 차의 가치를 결정하니까요.
1. 아파트 또는 직장에 완속 충전기가 있는가 (둘 중 하나는 필수)
2. 일일 왕복 출퇴근 거리가 전기 주행거리 이내인가
3. 배터리 소진 후에도 엔진 성능이 만족스러운지 시승해봤는가
4. PHEV 배터리로 인한 뒷자리·트렁크 공간 축소를 감수할 수 있는가
5. 충전을 꾸준히 할 의지가 있는가 (솔직하게)